판타지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많으시리라 생각됩니다.
특히 요즘은 해리포터부터 마블 세계까지, 관객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장르가 판타지 영화아닐까 합니다. 다른 차원의 세계애 대한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반영하는 판타지장르의 특성이 가장 극대화 되어있는 것이 바로 애니메이션이겠죠.
오늘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일본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소개합니다.

제52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
제75회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작품상 수상
제25회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 수상
제68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애니메이션부문상 수상
제28회 LA비평가협회상 애니메이션부문상 수상
제30회 애니어워드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각본상 4관왕
제85회 전미리뷰연합상 수상
영화는 주인공 치히로가 친구들에게 받은 작별 카드를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시작부터 관객들은 주인공의 이름을 각인하고 관람을 시작하는 것이죠.
시골로 이사가는 것에 불만이 많은 치히로는 친구들이 준 카드와 꽃다발을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그런 치히로의 마음은 아랑곳 하지 않는 부모는 길을 잘못들었음에도 무턱대고 악셀을 밟아댑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그리 오래 되진 않았지만 허름한 건물의 입구를 만나고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치히로의 뜻밖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90년대 일본사회에 대한 우화적 표현
영화는 곳곳의 상징을 통해 한 때 호황의 순간을 누리던 일본 사회가 90년대 버블경제가 무너지며 드러난 일본사회의 면면들을 우화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하지 않는자는 동물이 되어야 한다는 잔혹한 형벌때문에 이름도 빼앗기고 죽도록 일만 해야하는 온천의 직원들.
그렇게 돈, 돈, 거려도 결국 마녀 유바바에게만 모여드는 금전과
금은보화는 손에 넣었지만 진정 소중한것을 잃는지도 모른 채 자본의 노예가 되어있는 유바바.
영화가 갖고있는 상징성에 대한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모든 이야기들은 결국 무엇이 인간의 근본과 존재를 규정하는가에 대해 물으며 '자아'와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이름을 지키려하는 치히로에게는 그것은 자기 본연인 것이지요.

온천의 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서명을 하는 순간, 본래의 이름을 빼앗기고 마녀 유바바에게 하사받은 가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유바바에게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 어떠한 개인인가는 중요치 않죠. 그저 노동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만이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는 일본 경제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동안, 순수한 자기 자신보다는 어떠한 생산력을 지닌 직책으로써만 가치를 인정받았던 일본사회의 어두운 면을 투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을 위해 돈을 버는지 목적성조차 알 수 없지만, 그저 '언젠가 돈을 모으면 바다 마을로 갈거야' 라고 말하는 린의 푸념에서
막연한 꿈을 그것도 미적지근하게 갖고 노동자로써만 존재하는 이들의 모습을 엿볼수 있습니다. 자신의 진짜 이름은 무엇인지 잊은지 오래, 아니 더이상 궁금하지도 않은채 말이죠.

무엇이 '나'를 규정하는가. 내 이름을 불러줘.
하지만 노동을 하면서도 보상은 다른이에게만 주어집니다. 욕망은 끝도없이 채워지지 않고, 자신의 존재는 더욱 히미해져 갈 것입니다.
린도 언젠가는 전차에 탄, 그림자만 남은 이들처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희미해진 자아는 얼굴없는 존재로까지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로 '가오나시'죠.
얼굴이 없는, 존재감 제로의 가오나시는 그가 바로 옆에 서 있어도 있는지 모를정도로 희미한 존재입니다. 그를 알아봐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치히로 인 것이죠.
존재감이 없었기에 누군가와 교류를 할 수 없었던 가오나시는 치히로에게 집착하며 치히로의 관심을 갈구하게 됩니다.
치히로의 관심을 사기위해 금을 만들어내자, 옆에 있어도 있는줄도 몰랐던 모든 직원들이 그를 주목하게 되지만 정작 치히로는 금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가오나시는 치히로에 대한 열망, 사실은 관심과 교류에 대한 열망을 채우지 못하고 온갖 것들을 먹어치우고 정말 괴물이 되고야 말죠.
그리고 치히로는 강의 신에게 받은 경단을 가오나시에게 먹임으로써
그가 먹어치웠던 모든 불순물들을 토해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끝없는 허기와 구토
영화는 이물질들을 토해내는 장면을 몇번에 걸쳐 보여줍니다.
오물의 신으로 오해받았던 강의 신이 치히로 덕에 갖은 오물들을 토해내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끈엄없는 허기를 보여줬던 가오나시가 이물질들을 토해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하쿠를 얽메었던 유바바의 독충도 치히로가 경단을 먹임으로써 몸 밖으로 토해져나옵니다.
그렇게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모습을 변질시킨 이물질들을 모두 뱉어내야만
비로소 모두가 오롯이 자신, 자아 그 자체로써의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죠.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동안의 일본사회가 경제성장을 핑계로 너무 많은 것들을 가리지 않고 먹어치운게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을 잃어도 무턱대고 밟아대던 아빠의 아우디 자동차와 자신이 돼지가 되는줄도 모르고 먹어치우던 부모님의 모습처럼 말이죠.
감독은 그렇게 스스로를 변질시킬 정도로 욕망에 사로잡힌 일본사회를 낯선 세계에서 길을 잃고 성장해가는 한 소녀의 눈을 통해 바라보고 있습니다.
영화의 상징적 의미를 두고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오늘 리뷰에서는 '존재'와 '자아'에 대한 감독의 질문을 중점적으로 다뤄보았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다양한 정령과 신들을 존중하는 문화이죠.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을 보며, 우리나라의 토속신앙들도 미신으로 치부되기보다는 조금 더 존중받을 수 있는 역사적 환경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도 남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지만, 오히려 어린시절을 추억하는 어른들이 보면 더 좋은 영화.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모험> 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