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나 감독의 독특한 세계관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신선한 이야기를 발견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새롭게 창조된 그 세상에서 현재 우리사회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겠죠.
오늘은 '사랑하고있는 모습'을 강요하고 시스템화 하는 현대사회를 독특한 우화속으로 끌어드린 잔혹동화, 요르고스 란디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를 소개합니다.

당혹스런 오프닝
어디론가 달리고 있는 차 안, 한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속도를 냅니다.
그리고 당나귀가 노닐고 있는 어느 벌판에서, 여자는 문득 차를 세워 다짜고짜 당나귀 한마리에게 총을 쏩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이 프롤로그는 관객으로썬 당혹스럽기 그지 없지만 영화를 이해하고 나면 커플이 되지 못한 자의 말로는 얼마나 가치없는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장면이 됩니다.
뒤이어 주인공 데이빗은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는 아내에게서 이별통보를 받습니다.
재밌는 것은 여느 영화처럼 이별을 통보하는 아내와 함께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별통보를 받아들이는 데이빗과 그의 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객들이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한다'는 이 영화의 설정을 아직 모르더라도
(아마도 홍보문구를 통해 알고 관람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이별을 통보하는 대상을 화면에서 배제시킴으로써
주인공이 누군가와 헤어지고 버림받는다는 슬픔이 아닌, 알수 없는 불안감과 걱정에 휩싸이고 있다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데이빗과 개만 화면에 담겨야 했던 이유는, 호텔에 도착하면서 밝혀지기도 하죠.

선택의 의무와 강요만이 존재하는 사회
영화 속 세상은 이렇게 '커플'이 의무화 된 세상입니다.
'커플'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도시, 사회 속으로 돌아갈 수 있으며 혼자가 된 사람은 마치 사회 재교육을 받듯이 호텔에 머물며 45일 안에 커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45일 안에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어야 합니다.
선택의 여지란 없습니다. 커플이 되어 사회로 복귀하거나, 동물이 되어 인간이길 포기하거나.
만약 호텔에서 벗어나 도망자가 되더라도 커플이 되길 원하는 이들의 사냥감이 되는 신세이니, 이 역시 인간의 삶은 아니죠.
이렇게 영화 속 세상은 '선택'을 강요합니다. 하다못해 신발 싸이즈 조차 중간이란 없습니다.
데이빗이 인터뷰 때 성 지향성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 처럼 '운영'이 힘들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동식물을 비롯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모든것들에 이름을 붙인 것은 인간입니다. 이름을 붙이고 그들의 특성에 따라 분류하고 집단화 하는 것은 연구를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을 인간의 통제 또는 예측 범위 아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쩌면 영화속 세상이 사랑하지만 각자로 존재하거나, 양쪽 다 사랑하거나 하는 등의 중간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통제' 와 '시스템'이라는 인간사회의 단면을 투영한 것 이 아닌가 싶네요.
커플이 될 것인가, 사랑을 할 것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자본주의 사회와 결혼제도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언제나 생산자와 소비자가 필요하죠. 그것을 유지시켜주는 것이 바로 출산을 통한 인구 안정 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율에 맞겨서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그것을 권장하고 관리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는 호텔이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호텔에서는 '커플'을 선택해야만 안전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처럼 교육하며 '커플'을 선택할 것을 끊임없이 강요합니다.
때문에 동물이 될 위기에 처한 투숙객들은 '커플'이 되기위해 자신의 특수성을 포기하고 상대와의 공통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죠. 절름발이 남자는 자신과 같은 절름발이 여자를 찾을 수 없기에 대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코피를 자주 흘리기로 결정합니다. 주인공 데이빗 역시 냉혈한인 여자와 커플이 되기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냉혈한 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개의 모습으로 함께 있던 형의 죽음 앞에선 결국 냉혈한의 태도를 지키지 못하죠.
사랑의 타이밍도 결정할 수 없다
결국 호텔에서 빠져나와 도망자 무리에 들어가게 되는 데이빗.
아이러니하게도 데이빗은 '커플'사회 구조에 맞서는 도망자의 무리에서야 진짜로 커플이 되고픈,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와 똑같이 근시를 갖고 있는 '근시여인'과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들은 무정부주의라기보다는 반대 사회를 만들고 있었을 뿐입니다.
오히려 커플을 터부시 하고 발각될 경우 무거운 신체형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데이빗과 근시여인은 사랑을 들키지 않기 위해 그들만의 수화를 만들어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그 어떤 장면보다 아름다운 사랑의 몸짓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이 깊어질수록 감정은 통제할 수가 없고, 결국 들켜버리고 맙니다.
영화속 세상에서 사랑을 이룸에 있어, 정확히 말하자면 '커플이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공통점입니다.
그들이 사랑을 확신하게 되는 것도 둘 다 똑같이 근시를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죠.
도망자는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기 위해 근시여인을 장님으로 만듦으로써 그 공통점을 차단합니다.
사랑을 하고 있는가 커플이 되고 있는가
근시 여인이 장님이 된 이후도, 데이빗이 자신의 연인이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것 보다는
공통점이 없어진 것이 더 초조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사람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데이빗은 도망자무리에서 빠져나와 도시로 향합니다.
커플이 되어 장님이 되어버린 근시여인과 함께 살기 위해서죠. 하지만 그 전에 해결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통점.
카페에서 데이빗은 스테이크 나이프를 빌려 그녀와의 공통점을 만들겠다고 결심합니다.
이 장면 역시, 영화의 맨 첫 장면처럼 근시여인은 화면에서 배제한 채 나이프를 앞에 둔 데이빗만 화면에 담습니다.사랑을 지키기 위해 혹은 커플이 되기 위해 그는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선택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그의 선택에 따라 달라질 운명 때문인지, 카페에 남아있는 근시여인을 비추는 화면은 그의 빈자리가 돋보입니다.
과연, 이 둘은 커플이 되는데 성공하게 될까요?

건조한 연기, 극단적 슬로우 모션과 음악의 메타포
이 영화가 '커플'이라고 표현되는 '사랑'을 사회 구조, 시스템화 하고 있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 역시 지극히 감정이 배제된 채 시종일관 건조한 톤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그들을 담아내는 화면 역시 마치 적당한 거리를 둔 듯 건조한 시선을 보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호텔의 싱글들이 자신의 투숙 일정을 늘리기 위해 도망자들을 사냥하는 장면에서는
감정을 극대화 할 때 쓰이는 슬로우모션을 활용함으로써 그 무자비한 모습을 아름답게 포장하기도 합니다.
특히, 이 장면에서 쓰이는 음악은 '내부로 부터의 죽음'이라는 곡으로
인간성이 배제되고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버린 채 오직 자신을 위해 남을 희생 시키는 데 거리낌 없는 모습과 함께 이 영화가 주제를 표현하는 메타포가 되기도 합니다.
극도로 단순화된 설정으로 조금은 낯선 영화 <더 랍스터>
화면의 구성부터 음악, 배우의 연기, 의상의 디테일까지 모두 하나의 상징과 주제를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에 이어 영화가 세상을 다루는 방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닌가 합니다.
오늘은 기괴하고 독특한 자기만의 현미경으로 세상을 재구성한 요르고스 란디모스의 영화
<더 랍스터>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