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스쿨 추천영화 첫번째 이야기
한국 최고의 멜로드라마이자, 죽기 전에 꼭 봐야할 한국영화에 꼭 손꼽히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입니다.

장르 : 멜로드라마
개봉 : 1998.01.24 개봉 2013. 11.06 재개봉
감독 : 허진호
주연 : 한석규(정원), 심은하(다림)
등급 : 15세 관람가
관객수 : 98년 개봉 당시 70만
수상내역 : 제19회 청룡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외 6개부문 수상
'죽음을 앞둔 한 남자의 사랑'이라는 흔히 말하는, 가슴절절한 사연.
하지만 이 영화는 그 흔한 폭풍오열 한번 없이 매우 담담하고 섬세하게 그려갑니다.
'죽음'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어야 할 삶의 일부로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이 영화 곳곳에 녹아있는데요 그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오프닝 시퀀스 입니다.
오프닝 시퀀스 - 햇살 아래 잠이 들다.

일반적인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라면 초반 10분에서 15분, 사건의 발단 과정에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방향성 등을 함축해 놓는 경우가 많은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영화는 첫장면, 스쿠터를 타고 어디론가 달리고있는 주인공 정원의 모습에 이어 따스한 햇살 아래서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문틈으로 내리 쬐는 눈부신 햇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초등학교의 일상이 담긴 소리들.
이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줄곧 '죽음'은 '잠'으로 비유되어 왔죠.
30대, 인생 가장 절정의 시기에 '잠', '죽음'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인근 초등학교에서 들려오는 일상의 소리처럼 세상은 그의 죽음과 상관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은유는 이후 정원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며 흐르는 주인공의 나레이션에서 한번 더 표현됩니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앉아있는 것을 좋아했었다.
그 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묘사되는 텅 빈 운동장은 영화의 후반부 여주인공 다림과의 관계가 진전되면서매우 생기있는 장면으로 그리며 대조를 이루기도 합니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다.
주인공 정원은 죽어가고 있지만, 영화가 그 모습을 그리는 방식은 매우 사소합니다.
오프닝 시퀀스가 '잠'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했듯이 말입니다.
특히 주목받는 장면은 주인공 정원이 아버지에게 비디오 트는 법을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그 시대에만 해도 책 크기만한 VHS 비디오를 TV와 별도의 플레이어를 이용해 봐야했죠 ^^)

정원은 자신이 죽고 난 뒤, 혼자 남아있을 아버지를 위해 비디오 작동법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리모콘 작동법이 익숙치 않은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정원은 결국 짜증을 내며 방을 나가버리고 말죠. 그리고 차분히 종이에 작동법을 적어두는 모습까지 이어집니다.
정원은 아버지에게 비디오 작동법을 알려준다거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사진을 찍는 등 서서히 죽음을 준비해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거기에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는 할머니까지.. 다림과의 관계가 진전되어가고 있는 중에도 죽음에 대한 요소들이 배치되어
설렘 가득한 두사람의 만남을 더욱 안타깝게 만듭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처음엔 그저 사진관의 단골손님이었던 그녀, 다림.
불법주차 관리요원인 그녀는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툭하면 운전자의 시비에 휘말리고, 밥을 먹으러 간 칼국수 집에서 조차 문전박대를 당하는 신세죠.
그런 다림에게 정원은 유일하게 자신에게 웃어주는 사람이자, 초원사진관이 유일한 휴식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처음엔 그저 초원사진관의 사진사와 단골손님이었던 둘의 관계는 함께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동안 어느새 호감을 갖는 사이가 됩니다.
그 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정원은 사랑도 언젠가 추억이 될 감정입니다.
그렇다고 정원이 매정한 사람은 아니지만, 왜 아직 결혼하지 않았냐 조심스레 물어오는 첫사랑에게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 웃으며 '너 기다리려고 그랬지? 하하하. 너, 애가 둘이던가?'라고 웃을정도의 해탈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진행형, 그것도 아직 연인이라 확답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더욱 설레이는 순간. 놀이공원에서 첫 데이트를 즐기고 돌아오는 길, 정원의 팔을 은근히 감싸 팔짱을 껴오는 다림의 손길을 자연스레 받아들입니다.
병세의 악화로 며칠째 문을열지 않는 초원사진관. 다림은 처음엔 걱정된 마음에 편지를 쓰기도 하며 기다리지만, 서운한 다림은 그 편지가 후회스러워 다시 빼내려고 시도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버리지만 말입니다.
기별없이 계속 닫혀있는 사진관에 다림은 결국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맙니다.

주목할 만한 장면은 돌아온 정원이 다림의 편지를 읽어보는 장면.
보통의 영화라면 그 내용이 나레이션으로 흐를테지만, 감독은 그 내용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편지를 보며 미소짓는 정원의 모습에서 그 분위기만 엿볼 수 있을 정도이지요.
영화의 클라이막스에 해당되는 이 장면들은 다림의 기다림부터 퇴원 후까지도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다림이 기다리는 모습과 돌아와 편지로 그 마음을 읽는 정원의 모습을 그저 '보여줌으로써' 언어적인 설명은 절제하고 이미지와 분위기로 전달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 멀리서 다림의 모습을 바라보고 사진관으로 돌아온 정원이 스스로 영정사진을 찍는 장면까지도 이렇다 할 대사는 없습니다. 약 15분 동안.
정원이 정말로 떠난 후.
세월이 지나 다림이 찾아간 초원사진관에는 정원이 찍어준 다림의 사진이 걸려있습니다.
사진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는 다림의 모습 위로 어쩌면 정원이 다림에게 남겼을 편지처럼 정원의 목소리가 흐릅니다.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감독은 마치 '죽음도 삶의 일부일 뿐' 이라고 말하는 듯 합니다.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묘사.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부분까지도 의미를 전달하며 남녀 주인공들이 서서히 서로에게 젖어들 듯, 관객들도 그 감성에 젖어들게 하는 매력을 갖고있는 영화입니다.
담담해서 더 마음을 울리는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였습니다.
*이 리뷰는 SBS <영화 읽어주는 남자>- 이동진 평론가 해설을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