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영화를 다루면서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영화를 비롯한 여러 이야기매체에서 다루는 청춘은 더이상 눈부시지 않습니다. 마치 이미 결정된 인생을 말하듯 수저의 색깔이 나뉘고, 먹고 사는 일이 꿈이 되어버린 이 시대의 불안하고 암울한 청춘.
오늘은 그 불안하고 암울한 청춘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한 청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창동 감독이 8년만에 메가폰을 든 작품, <버닝>입니다.

수상내역
2018년 제71회 칸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벌칸상 (신점희 미술감독)
2018년 제2회 신필름예술영화제 신상옥감독상 (이창동)
2018년 제25회 아다나 국제 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최우수 작품상
2018년 제39회 마나키 브라더스 국제 영화제 황금 카메라상 (홍경표)
2018년 제2회 핑야오 국제 영화제 동서교류공헌상 (이창동)
2018년 제27회 부일영화상 최우수 감독상 (이창동) / 음악상 (모그)
2018년 제55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
2018년 제38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촬영상 (홍경표)
/FIPRESCI 한국본부상 / 올해의 영화 11선
2018년 제3회 프렌치 시네마 투어 에뚜왈 뒤 시네마 상
2018년 제28회 필름 프롬 더 사우스 페스티벌 실버 미러 상
2018년 제7회 키웨스트 영화제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2018년 제19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기술상 (홍경표 촬영감독)
2018년 제18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특별언급
암울한 리틀 헝거의 현실
영화는 시작부터 답답합니다. 마치 벽을 마주한 것 처럼 화면을 가득찬 택배 차량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그 뒤로 희뿌연 담배연기가 뿜어져 나옵니다. 카메라는 짧은 담배타임을 마친 종수가 어깨에 한가득 짐을 얹고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한발 뒤에서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연히 어릴 적 친구였던 해미를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해미는 자신이 설명하던 리틀헝거입니다. 그저 생존의 굶주림을 느끼는 사람.
그레이트 헝거처럼 인생의 의미에 대한 갈증을 느낄 여유따위는 없습니다.
북향으로 난 창으로 아주 잠깐 햇빛이 들어오는 시간, 그것도 남산타워에 반사된 빛이 아주 잠깐 스쳐가는 그녀의 집이 리틀헝거의 삶을 살고있는 그녀의 현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집에 마주 앉은 종수 역시 마찬가지겠죠.

더구나 종수는 어릴적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에, 성격을 굽히지 못한 아버지가 실갱이하던 공무원을 칼로 찔러버려 구속된 상태입니다. 소설가라는 꿈을 꾸긴 하지만 현실은 택배와 물류창고를 전전하는 알바신세일 뿐, 생계에 목이 메인 리틀헝거인 것은 마찬가지죠.
아마도 영화의 초반, 이 둘이 사랑을 나누는 순간은 해미의 집에 깃든 햇빛이 아주 짧게 스쳐가는 것 처럼, 이들의 남은 시간 중 유일하게 빛나는 순간일 것입니다. 종수도, 영화도 그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불확실성의 존재들
이 영화의 전반적인 이미지는 모호함 입니다.
마치 비닐하우스 너머로 뿌옇게 보이는 종수의 얼굴처럼, 그 무엇하나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벤이라는 인물은 그저 돈이 많아 보인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고,
소설을 쓴다는 종수는 진짜로 소설을 쓰고있다 보여지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벤이 진짜로 해미를 죽였는지도 확실치 않습니다. 그저 종수의 의심을 따라갈 뿐이죠.
해미가 종수에 대해 기억하는 중요한 사실, 우물에서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일화도 실제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 모두 우물같은것은 없다고 말할 뿐이고, 영화의 후반부 오래전에 자신을 떠났다가 태연스럽게 돈을 빌리러 나타난 무정한 엄마만이 마른 우물같은 게 있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 할 뿐입니다.
그리고 해미는 허구의 것을 진짜처럼 여기는 '판토마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귤이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게 핵심.
해미는 그렇게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허구 안에서 욕망을 채웁니다.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던 고양이 '보일이' 역시 진짜로 있는지 알수 없는 존재이죠.
종수는 또 실제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보일이'의 밥을 챙겨주며 해미가 말하는 진실된 허구의 세상으로 발을 디딥니다.
그리고 벤이 진짜로 비닐하우스를 태우고 다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지만, 종수는 어딘가 불타버렸을 비닐하우스가 있을지 모른다는, 그리고 사라진 해미가 있을지 모른다는 그 불안감을 쫒아 새벽마다 희뿌연 안개 속을 달립니다.
영화는 이 이야기가 진짜인가, 종수가 지어내는 허구의 이야기인가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실제로 마지막 장면에 무언가를 쓰고 있는 종수의 모습이 보이지만, 그것이 소설인지는 모를 일이죠.
이러한 모호함은 관객들이 영화를 난해하다 여기게 하기도 하지만, 그 의문들이 주는 미스테리한 분위기로 더욱 풍성환 영화가 되기도 합니다.
불확실성 가운데 확실한 것
마치 안개속을 달리는 종수처럼 모든것이 희미한 이 영화에서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레이트 헝거와 리틀헝거의 명확한 구분, 벤의 삶과 종수 해미의 삶의 '차이'입니다.
종수의 식사란 일을 하러 나가기 전 끼니를 떼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벤은 신에게 재물을 바치는 것처럼 '요리'를 합니다. 때문에 벤의 식사는 먹는 행위 그 자체 보다는 즐기며 요리를 하고, 누군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한 부수적인 것에 더욱 집중되어있습니다. 거기다 영화의 후반 벤이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는 용산참사를 주제로한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갤러리이기도 하죠. 벤의 가족들은 그저 장식 이상의 가치는 없다는 듯 그 장소에서 즐거운 식사 시간을 갖습니다.
벤이 해미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신기한 놀이감을 보는 듯한 시선입니다.
그레이트 헝거로 나아가기 위한 자신의 이상에 대해 신나게 떠들어대는 해미를 벤의 친구들은 조롱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벤은 어느순간 무료함을 느끼는 듯 하품을 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벤에게 해미, 그리고 종수같은 존재는 버려진 비닐하우스처럼 어느날 갑자기 불타 잿더미가 되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그런 쓸모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한순간 벤 자신의 '재미'가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그 가치는 끝나는 것이죠. 그래서 스스로 그들 또는 그것들의 구원자라도 된 듯이 태워 없애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진짜 비닐하우스인지 혹은 해미와 같은 외로운 리틀헝거인지는 모호하지만 말입니다.

돌파구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다
아버지가 금고 속에 숨겨둔 칼자루들. 그것은 리틀헝거로써의 마지막 자존심일 것입니다.
그렇게 굽혀지지 않는 아버지의 자존심은 종수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잘 쓴 탄원서를 내밀어도 반성의 여지 없이 곧이 곧대로 형벌을 받아들이고 말죠. 그 아버지의 분노, 자존심이 형상화 된 것이 금고 속의 칼 입니다. 그런 종수에게 해미가 벤의 친구들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은 치욕스러운 장면일 것입니다. 리틀헝거로써의 자존심을 그들에게 놀이감으로 갖다바친 꼴이니까요.
그리고 리틀헝거의 삶을 물려받은 종수는 아버지의 그 자존심을 깊이 숨겨 뒀던 '칼'로써 이어받습니다.
암울한 현실을 더욱 크게 느끼게 하는 상대적 박탈감. 벤에게 느끼는 종수의 감정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하면 이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영화는 끊임없이 몰락하는 현실을 그립니다. 새벽 안개를 헤치며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는 종수의 모습이 보이기는 하지만, 단 한번도 해가 뜨지는 않습니다. 태양은 그저 노을이 질 때만 카메라에 모습을 나타내죠.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 분노하며 리틀헝거가 할 수 있는 일은 '판토마임'입니다.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이 핵심. 그럼 진짜 귤을 먹을 수 있다는 해미의 말처럼
이러한 현실을 살아가는 청춘들이 꿈을 꾸고 욕망을 채우는 방법은 '탈출구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상의 탈출구를 만들어 자위를 하는 종수처럼 아주 잠깐 스스로를 만족시키며 세상에 대한 욕망을 해소시키는 것입니다.
허구 속의 진실한 감정
영화속 사실들은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그 경계가 모호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어쩌면 오프닝 타이틀 이후의 모든 일들이 해미가 말한 '판토마임'처럼 허구인 것을 잊어버린 이야기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안개속 이야기에서 확실한 것 한가지는 '감정'입니다.
해미가 느끼는 외로움, 벤이 느끼는 삶의 무료함, 그리고 그들과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며 분노하고 불안해하는 종수의 감정만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실일 것입니다. 때문에 영화는 각 인물들의 감정을 담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들이 느끼는 외로움, 분노, 불안감을 가공없이 전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주인공인 유아인 배우는 이전과는 다른 패턴의 연기를 보이며 섬세하게 종수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유아인 배우는 다소 격양된 호흡과 과감한 표현들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배우였습니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청춘의 아이콘과 같았던 배우는 <버닝>에서는 일상적이고 절제되어있는 표현을 통해 허구속 이야기에서 진실성있는 감정을 전달하며 호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버닝>은 개봉관에서 내려온지 시간이 조금 지났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아직도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소식을 전해오고 있습니다. 최근 주연배우인 유아인 배우가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배우 12인 중 유일한 아시아 배우로 손꼽혀 화제가 되기도 했죠.
이러한 가운데 아카데미의 외국어 영화상 부문에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인지 관심을 모으고 있기도 합니다.
관객들에게는 조금 불친절한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점점 서사구조나 문학성은 등한시 된 채 설정만이 난무하는 영화 산업에서, 영화의 예술적 가치를 잃지 않는 이러한 영화의 등장은 이러한 불편함도 반가운 일일 것입니다.
오늘은 이창동 감독이 8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영화 <버닝>이었습니다.
본 포스팅은
유튜버 다크썸의 <버닝, 이제 진실을 얘기해 줄게 10가지 해석 -part 1>을 참고로 작성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MIjd5VVQsE
영화전문입시학원 <시네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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